4) 주님의 훈련과 훈계 안에서 양육하는 일
지금까지 우리는 교육의 기본적인 이해 세 가지를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말하는 교육은 앞에서 다룬 세 가지 이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이는 인간이 다만 동물과 식물로부터 구별되는 특성일 뿐만 아니라, 그 특성 자체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특성이 교육을 통하여 실현되지 아니한 인간은 세속적 눈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성숙한 인간이나, 기독교적 눈으로 보아서는 여전히 회개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타락한 존재로 머물러 있는 인간일 뿐이다.
한번 살펴보자. 인간은 몇 번이나 태어나는가? 많은 크리스천 대학생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 안으로 한 번, 그리고 삶의 어떤 경험이 계기가 되어서 회개의 체험을 통하여 복음적으로 거듭나는 것 또 한 번, 이렇게 두 번 태어난다고 말한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많은 대학생들은 아마도 세 번 태어난다고 말할 것이다. 처음에 갓난아이가 모태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 육체적 탄생이다. 이어서 산파가 아이를 닦아주고 포근하게 감싸주고 등을 토닥거려 주어서 숨 쉬게 하고 어머니 품 안에 눕혀준다. 이렇게 하여 심리적 탄생이 이루어진다. 그리곤 신생아기와 영유아기를 지나면서 아이는 엄마와 아빠를 사랑의 대상으로 알게 되고, 먹고 싸고 자는 형식과 질서를 익히고, 말하기와 놀기를 배우면서 차츰차츰 사회적 능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사회적 탄생이다. 이렇게 세 번 태어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참으로 훌륭하다. 그러나 충분하거나 정확하진 않다.
인간은 몇 번이나 탄생하는지 한번 둥글게 고찰해 보자.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세포생명이 탄생한다. 이것이 첫 번째 탄생이다. 그리곤 9개월 10일이라는 자궁 안에서의 성숙기를 거쳐서 육체적 탄생과 심리적 탄생이 일어나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만나고 이웃과 사귀면서 사회적 탄생이 이루어진다. 많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이렇게 네 번의 탄생경험으로 끝나는 삶을 살다가 간다. 그러나 축복받은 사람은 다시 영적으로, 다시 말하면 종교적으로 탄생한다. 이것이 다섯 번째 탄생이다. 인간은 세포생명의 탄생, 육체적 탄생, 심리적 탄생, 사회적 탄생, 그리고 종교적 탄생, 이렇게 다섯 탄생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탄생은 종교적 탄생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탄생이 성숙한 삶, 완성된 삶, 구원받은 삶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육의 네 번째 개념이 나온다.
교육은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워서 참 가치와 만나게 하고 참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회복하게 하는 활동이다. 교육은 실존적 각성의 경험을 갖게 하여, 그 자신의 주관적 신념인 절대가치의 토대 위에서 인생을 전체적으로 철저하게 새로 세우게 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삶의 기준의 전환을 요청하는 위기로 체험되는 곳에서 농도 짙은 교육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교육은 그러한 만남의 교육을 항상 열어놓고 있고 또 목적하고 있다. 이를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교육은 언제나 이미 죄인인 인간을 '주님의 훈련과 훈계 안에서' (엡 4:6)'3) 회개하게 하여 구원받은 인간에로, 하나님의 형상에로, 영화롭게 된 인간에로 양육하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을 구원에로 교육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하나님만이 홀로 인간을 교회와 인간을 통하여 구원에로 교육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와 가정은 하나님의 학교요,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을 회개하고 중생하여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교사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언어와 경험을 카테고리로 삼아서 인간을 교육하시기 때문에, 칼빈은 하나님의 교육을 조절' (accomodatio)의 원리로 설명하였다. 4 교회학교 교사는 다만 인간을 구원에로 교육하시는 하나님의 교육의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은 믿음, 소망, 사랑, 인도, 훈련, 기도, 경고 등을 통로로 이루어지며 회개와 중생, 화해와 쇄신, 구원과 영화를 목적하는 복음의 교육이다.
- 각주 -
1) Anhang zur zweiten Auflage: Über die ästhetische Darstellung der Welt als das Hauptgeschäft der Erziehung. In: Herbart Kleinere Pädagogische Schriften. Hrsg. von Walter Asmus. Düsseldorf und München 1964, S.105ff.
2) 오인탁, 현대교육철학(서울: 서광사, 1990), 21 이하 참조.
3) Johann Amos Comenius, Pampaedia, Hrsg. von H. Geissler und K.Schaller. Heidelberg 1965, S.51ff.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를 잘 읽어낼 수 있다.
4) 오인탁, 「파이데이아, 학지사 2001, 184쪽 이하 참조.
5) Immanuel Kant Über Pädagogik (1803). Schriften zur Anthropologie Geschichtsphilosophie Politik und Pädagogik, Kant Werke Band 10, Zweiter Teil. Hrsg. von W. Weischedel, Darmstadt 1971, S.697.
6) F. E. D. Schleiermacher, Ausgewählte padagogische Schriften, Besorgt von Ernst Lichtenstein, Paderborn 1959, S.42.
7) 정범모는 교육을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고 정의하였다(정범모, 교육과 교육학(서울 : 배영사, 1976), 16. 그리하여 한국에 교육의 경험과학적 개념을 뿌리내리게 하는 권위가 되었다.
8) human resource development, HRD로 약칭한다. HRD는 산업교육과 성인교육의 분야에서만 중요한 개념으로 강조될 뿐 아니라, 오늘날 국가, 교회, 사회, 등, 전체의 보존과 발전을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에서 폭넓게 확인하게 되는 교육개념이다. 교회교육도 성실한 교인의 배양을 주된 목표로 삼고 있는 교육은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 HRD이다.
9) 인적자원을 중시하는 교육은 이미 만드는 교육의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과제를 수행하는 행정부의 명칭을 '교육부'에서 '교육인적자원부'로 개칭하고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한 데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보다 더 수공업적 이해와 관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 Aristoteles Hauptwerke Ausgw, übers, und eingl. von Wilhelm Nestle, Leipzig 1934, S.151.
11) 루소는 그의 교육소설 에밀」에서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잘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소를 반교육사상과 운동의 원조로 본다. 오인탁, 루소, 위대한 교육사상가들 II. 교육과학사 2001, 189-244 참조.
12) "die Unentschiedenheit der anthropologischen Voraussetzungen". F. E. D. Schleiermacher Ausgewählte Pädagogische Schriften, Bes, von Ernst Lichtenstein, Paderborn 1959, S.51.
13) 에베소서 4장 6절은 우리 말 개역성경에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로 번역되어 있다. 독일어 루터번역에는 "주님을 향한 훈련과 경고 안에서" (in der Zucht undVermahnung zum Herrn)로 되어 있다. 그리스어는 "en paideia kainouthesia kyriou"이다. 그리스어를 직역하면, “주님의 훈련과 훈계 안에서"가 된다. 우리말 '로'는 독자에게 필연적으로 주관적 해석과 선택의 관점을 강요하나, '안에서'는 성령에 의하여 복음 안으로 인도됨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다르고 분명하다. 그래서 그리스어의 직역을 수용하였다.
14) Reinhold Hedtke, Erziehung durch die Kirche bei Calvin, Heidelberg 1969,S.37. Calvin은 하나님의 교육활동 (paedagogia Dei)을 하나님의 조절(accomodatio Dei)로 설명하였다. 양금희는 이를 하나님의 눈높이 교육"으로 번역하였다(양금희, 존 칼빈, 「위대한 교육사상가들 I. 교육과학사 1996 410쪽). 그러나 '눈높이'라는 표현은 라틴어 accomodatio(조절)의 뜻을 탁월하게 설명하는 언어일 뿐이다. 설명어를 번역어로 삼을 경우에 오히려 언어에 담겨있는 의미의 다양한 새로운 이해를 제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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