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독교교육 인간학적 물음
기독교교육학은 교육학이기 때문에, 인간학적 교육학의 기본확신 위에 서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종교적인지, 다시 말하면 천부적으로 인간에겐 종교적 바탕이 있기 때문에 종교적 심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백지상태로 태어난 인간에게 추후적으로 종교적 경험을 갖게 해 주어서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되는 것인지, 이에 관한 논쟁은 대단히 오래된, 어린이와 청소년의 종교성이 문제시되는 곳에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고전적 물음이다.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 물음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하나님에 관한 물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교육은 전통적으로 태어날 때에 가지고 태어나는 내면적 잠재 가능성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밖으로부터 안으로 작용해 들어오는 경험들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면서 개발된 고 발달된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져 왔다.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부터 어떤 은사로 무장하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다만 “우리 각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신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엡 4:7) 열심히 교육할 뿐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린 자녀가 묻는다: "할머니 어딨어? 하늘나라에 갔어? 땅에 묻었잖아!?"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종교적 물음이 존재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선 그러한 해석은 지나치다. 여기서 의미 있는 것은 어린이가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당혹해하면서 수수께끼처럼 풀 수 없는 물음을 안고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린이는 어른이 확실하게 대답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어른의 답을 들으면서 어린이는 이 문답에 담겨있는 종교적 의미를 내면화한다. 태어나면서 기독교인은 없다. 전통적인 종교일수록 교회의 전승과 성장단계에 따른 종교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흔히 빠져들게 되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종교관은 그러므로 인간학적 고찰을 통하여 용이하게 탈신화화되어버린다.
Nipkow는 1987년에 하나님 없이 어른이 되기? - 생애에서 하나님의 경험」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현대와 같은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 컴퓨터 게임과 워크맨에 젖어서 성장하는 어린이들의 성장과 신앙의 문제를 다루었다. 오늘날 다만 어린이뿐만 아니라 3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들의 절대다수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조용한 여행'을 하고 있다. 각자의 바쁜 삶 속에 자기 자신을 묻어두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안에 품고 또는 내어 걸고 생활하곤 있으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는 제대로 모르고 있다. 교회는 그들을 교인으론 최우선적 관심으로 배려하나, 돌보아야 할 영혼으론 무관심 속에 방치하고 있다. 본훼퍼가 강조한, 하나님을 삶이 가장 힘차고 역동적인 생애의 한 복판에서 만나기를 도모하지 않고 있으며, 만나도록 하는 교육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항상 삶의 현실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그 안에서 밝혀주어, 인간의 삶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4. 훈련, 과학, 지혜의 학문
오늘날 우리는 시장경제적 교육관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기독교교육학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교육학이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이 시대에 비전을 제시하고 선취하는 접근을 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성령을 모든 백성에게 주시어 그들이모두 선지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던(민 11 : 29) 모세처럼,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교육학을 그렇게 희망하고 천착하여야 한다. 기독교교육학이 걸어온 2000년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비판적으로 회고하면서 서론을 마치려고 한다.
초대교회에서 중세기의 중기에 이르는 첫 천년 동안의 기독교교육은 신앙과 생활의 공동체 안에서 생활이 도야하였던 시대에 이루어진교육이었다. 그래서 수업(didache)이 아니라, 훈련(paideia)이 제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생활은 기록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고, 문답식 가르침만 텍스트로 남아 역사가 되었다. 그래서 문답식 가르침인 디다케가 교육의 전부였던 것처럼 역사는 읽혔다. 그러나 디다케는 텍스트가 아니었다. 텍스트는 살아있는 영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엄격한 신앙생활이었다. 디다케는 텍스트의 설명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첫 천년에서 주님의 파이데이아를 생활한 기독교교육의 선조들을 읽어낼 수 있다.
대학의 설립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두 번째 천년의 기독교교육을 전체적으로 개관하면, 이 시기에 제도가 교육하였다. 신학의 집이 세워지고, 이 집안에서 대학이 탄생하였다. 신학은 의학과 법학과 더불어 삼대 학문의 하나가 되었으며, 대학의 중심이 되었다. 대학에 주어진 "무제한적 교수의 자유" (licentia ubique docendi)는 신학이 있으므로 해서 가능하였다. 신학은 철학을 비롯하여 모든 학문을 시녀로 거느리고 연구와 교수의 기관을 세웠다. 신학 자신이 교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교육이 되었다. 제도가 교역자를 양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육실천의 자리에 이론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론이 되어버린 디다케가 생활이라는 텍스트를 교육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삶으로부터 분리된 교육은 텍스트가 되어 카테키즘(katechesis)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카테키즘은 교수학(Didaktik)으로 발전하였다. 교육은 학교교육이 되었으며, 연습, 수업, 도야, 교육으로 세분화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교육은 커리큘럼이 되었으며 공과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세 번째 천년의 문턱을 들어서고 있다. 이제 기독교교육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두 번째 천년이 시작되었을 때에 신학은 모든 학문의 왕관이었으며, 교사였다. 신학의 큰 가르침 아래서 모든 학문은 연구되었으며 모든 인간은 교육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천년이 끝나게 되었을 때에 신학은 모든 학문들 가운데 하나일 뿐, 왕관도 교사도 아니고 중심적 위치에 있지도 않게 되었다. 신학은 이미 교사의 권위와 기능을 상실하였다. 신학은 교사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나 학문과 인간은 신학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였다. 이렇게 세 번째 천년은 시작되었다.
다시 한번 돌아보자. 첫 천년에 기독교교육은 지혜(sapientia)와 훈련(paideia)이었다. 문답식 수업(didache)은 훈계(nouthesia)와 더불어 교회의 훈련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다음 천년에 기독교교육은 과학(scientia)과 교육(erziehung)이 되었다. 훈련은, 특히 경건 훈련은 교육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가 두 번째 천년기 말에 급속하게 변두리로 밀려났다. 새 천년을 시작하면서 기독교교육은 잃어버린 본질과 과제를 다시 발견하고 회복하는 일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 지혜와 훈련을 다시 찾아서 과학과 교육 안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서 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교육에 나란히 세워서, 마치 두 중심을 가진 타원처럼,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을 해체하고 조화를 이룬 기독교교육의 집을 새롭게 세우자는 것이다.
그런데, 첫째 천년에 신앙과 생활이 바른 가르침(orthodoxie)과 바른 실천(orthopraxie)의 내용과 형식으로 정리되어 세계를 지배했다면, 둘째 천년에는 신학과 교육이 이론과 제도로 정립되어, 그 자체가 바른 가르침이 되어서, 바른 실천을 삼켜버렸으며, 신앙과 생활을 지배했다고 하겠다.
이제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언제나 이미 와있는 셋째 천년을 이렇게 전망하면서 기독교교육학의 과제를 내다본다. 셋째 천년은, 크게 볼 때에, 첫째 천년과 둘째 천년의 좋은 점들이 종합을 이루어 기독교교육학의 새로운 집으로 지어지고 계속하여 다시 지어지는시간이 될 것이다. 요청되는 것은 다만 첫 번째 천년의 색깔이 바탕색이 되어 그 위에 두 번째 천년의 색깔이 칠해지는 것이다. 새로운 천년에 경건의 학문인 기독교교육학이 '진리와 자유' (요 8:32)의 천년을 펼쳐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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