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부들의 기독교교육
초기 기독교는 보잘것없는 종교로 취급당했다. 그러나 점점 왕성해졌다. 303년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의 외적 박해와 교회 안의 내적 갈등으로 교육제도가 생겨났다. 내적 갈등에서 개종자들이 기독신앙의 의미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게 되었다. 내적 갈등은 기독교가 전파된 각 지역의 고유종교로 인해 새 신자에게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문제였다. 성찬예식도 교육받은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교부들이 교사역할을 했다. 유세비우스의 역사(1976)에 따르면 신자의 아버지로 불린 교부들은 다음과 같은 교육을 했다.
먼저 저스틴 마더(100-165)는 이원론적인 플라톤 철학에 심취해서 금욕주의의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 철학 측면에서 기독교를 체계화했다. 또한 기독신앙과 고전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기독신앙과 성서와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기독교를 옹호했다. 클레멘트의 알렉산드리아(150-215)는 헬라 철학자로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다. 지식이 신앙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 등의 지식이 신앙을 촉진한다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신앙은 지적 이해를 요구한다며, 신앙학습에 있어 인지역할이 크다는 것을 강조했다. 오리겐(185-254)은 가장 뛰어난 저술가이자 교육가였다. 그는 이 방사상과 기독사상을 접목했다. 모순되어 보이는 성구를 이성적으로 해석했다.
크리소스톰(347-407)은 설교가로 교육의 도덕적 목적을 강조하였다. 자녀교육에 대한 허영과 바른 태도, '양심의 가책에 대한 두 권의 책', '불행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진 자들에 대한 책', '처녀성에 관하여」 등 저술 등에서 불 수 있는 것처럼 학습자의 호기심과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고, 재미있게 학습자의 흥미를 유발했다. 터툴리안(150-220)은 법률가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변증가로 활약했다. 기독교인이 속세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속인과 함께 배우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 397년 '기독교교육과 고백'에서 교육목적을 평신도든 목회자는 '교수지침 준비'로 규정했다. 교수과정에서 언어 외에 기호도 사용했다. 인간은 말로 교육되지 않고, 하나님이 내적으로 학습자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스스로 배운다고 확신한 그는 교사가 말솜씨가 다양해야 하며, 학생들을 존중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강압적이거나 독재적인 교육을 반대하고, 용기와 자극을 주며, 스스로 탐구하는 동기유발 기술을 강조했다. 그에게 신앙교육은 교사와 학습자, 학습자와 학습자 교육참여자와 성서, 참여자와 하나님과의 대화였다. 교회의 요청으로 1~3세기에 초신자 세례문답학교가 설립되었고, 3세기에 이르러 정규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최근의 교회 기구와 흡사하다. 450년경 유아세례가 확대되면서 이 학교는 퇴조했다. 이 학교의 교육목적은 단순히 지식훈련이 아니라 교리와 신앙생활 훈련이었다.
교부들은 교육내용을 교리, 예배의식, 세례에 필요한 예비훈련 등 3등급으로 나눴다. 수학기간은 2~3년이었다. 학습의 장은 교회였다. 교사역할은 초기에 감독과 사제 및 집사가, 후기에는 전문교사가 맡았다. 교육방법은 교리문답서 등을 중심으로 한 문답식이 주류였다. 2C말~3C 사이에 교리문답학교가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마가가 세운 교회는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로 발전했는데 클레멘트, 오리겐 등의 교부들이 학교장을 맡았다. 예루살렘의 에데사와 니스바스, 또한 콘스탄티노플 학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4. 중세시대 기독교교육
기독교는 박해 중에도 로마제국에 이어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북아프리카, 중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일반백성뿐 아니라 정부관료, 왕실직원, 군부 등 상류계층까지 전파되었다. AD 284년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은 천민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군부에서 능력과 조직력을 발휘하여, 동료들을 등에 업고 황제로 집권한 후,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를 막고자 말살정책을 폈다. AD 303년대 기독교 박해령을 4회에 걸쳐 발표하여 기독교인을 체포하고, 교회를 파괴하며, 이방신을 숭배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성서를 몰수하며, 교역자를 체포하여 가뒀다. 그러나 AD 311년 콘스탄틴이 황제로 즉위하자, 국가 기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독교의 선교자유를 허용하고, 2년 후에는 완전자유를 허용하는 '밀라노 칙령' 을 선포했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오랫동안 추진한 통일과업을 위해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려 한 것이다.
황제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새 로마'라 칭했다. 국민들은 황제를 존경하는 의미로 그 도시명을 '콘스탄티노플'로 명명했다. 이에 힘입어 3세기 후반 기독교는 빠르게 성장했다. AD 319년 교역자는 법으로 면세혜택을 받았다. 또한 교역자를 위한 헌금제도가 설치되었다. AD 321년 법적으로 교회는 대부를 받고, 일요일에는 휴무령이 내려졌으며, 이방신에 대한 봉사가 금지되었다. 로마, 예루살렘, 베들레헴 등에 대형교회가 설립되었다. 타운즈(Towns, 1975)가 밝히는 것처럼, 중세기에는 통상 교육방법은 사도신조와 주기도문과 도덕적 주제의 설교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설교할 때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상징으로 가르치는 교육방법이 등장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심화를 위해성례전을 자주 거행하였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성서를 이해시키는데 종교미술을 활용하였다. 내면세계를 드러낼 때 종교극을 도입하였다. 또한 순례, 교회력, 건축양식, 음악 등의 상징을 활용했다. 상징 교육은 초반엔 성공했으나, 중세 말에는 퇴조했다. 원인은 상징교육이 처음 한두 번은 교육의미가 있지만 반복될수록 변질되어 마술화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방탕한 여인이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가슴에 십자가상을 달고 다닌다거나, 액운을 막아준다며 미신처럼 문설주에 십자가를 달거나, 옳지 않은 일을 하기 전에 미리 용서받고자 십자성호를 긋는 것 등이 그 예에 해당했다. 수도원 교육이 발달하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학문이 등장하여 교육 수준이 높아지자 상징 교육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중세 교육의 장은 교역자를 위해서 성 베네딕트(AD 529년)와 사원학교가 생겼다. 일반신도를 위해서 외곽학교와 대성당학교가 설립되었다. 외곽학교에서는 의학, 법률학, 신학 등을 가르쳤다. 나아가 오늘의 대학에 해당하는 유니버시타스가 등장했다. 교수들은 조합(Guild)을 형성하여 월급인상 등을 요구하고, 학생 또한 조합을 조직하여 학과증설 등을 요구했는데 조합과 조합이 합하여 대학이 되었다.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 대학은 법학과 학생운동이 발달했다. 파리대학은 신학을 중심으로 교수운동이 활발했다. 중세 교육은 이와 같이 대중이 배우는 대학이 탄생된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한계점은 때로 교육이 교권확장 수단으로 이용되고, 중세 초기엔 성직자와 귀족에게만 교육기회가 부여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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