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독교교육학의 기본적 물음
1) 기독교교육학의 학문적 위치에 관한 물음
기독교교육학은 신학과 교육학 사이에 있다. 사람들은 교육학을 신학의 시녀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세 이래로 전승되어 내려온 신학 중심의 중세적 학문관이 여전히 우리 기독교계의 학문이해로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회가 세계를 지배하였던 중세에 철학은 철저히 신학의 시녀였다. 철학은 교수권과 연구권을 향유할 수 없었다. 철학은 다만 신학이 연구하도록 명한 과제를 연구해내어야 하는 책임만 있었다.
오늘날 기독신학의 부분과학으로 보는 동시에 교육학의 부분과학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이렇게 보는 것이 마땅한 면도 있다. 기독교교육학은 신학과 교육학 사이에 함께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교육학자와 교사는 필연적으로 편향적 학문탐구와 실천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신학교육을 받고 신학 안에서 교육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기독교교육학은 신학의 한 영역이다. 그러나 교육학 중심으로 기독교교육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기독교교육학은 교육학의 한 영역이다. 신학의 한 영역으로서의 기독교교육학은 실천신학에 속한다. 그러나 교육학의 한 영역으로서의 기독교교육학은 종교교육학에 속한다. 그래서 학자의 관심과 편향에 따라서 기독교교육학은 교육신학이 되기도 하고 종교교육학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직하기는 기독교교육학을 그 자체의 고유한 자율에 있어서 인식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기독교교육학은 신학과 교육학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편향적 학문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교육학이 이론과 실천의 탐색에서 신학과 교육학 사이에서 마치 시계추처럼 평형과 균형을 유지하며 교육의 집을 세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세계의 모든 현상을 복음의 빛 아래서 그리고 오로지 교육의 관점으로, 다시 말하면 복음중심의 신앙과 교육중심의 인식관심이라는 두 가지 전제조건 아래서 고찰하고 인식하며 실천하는 노력을 통하여 기독교교육학은 고유한 독자적 학문의 집으로 지어져 갈 것이다.
기독교교육학자로서 신학과 교육학의 관계를 주관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학문적 고민과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기독교교육학자로서의 자아정체성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독일의 세계적 기독교 교육학자 Nipkow도 Herder, Schiller, Lessing, Humboldt, Goethe, Kant 등, 독일문화권을 넘어서서 세계적 의미를 갖고 있는 계몽기의 철학자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기독교적 교육학에 대한 관심 사이에서 학문적 정체성과 학자로서의 자아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고민에 빠졌던 시기가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Nipkow는 이러한 고민을 다음과 같이 극복하고 있다. 만약에 교육학과 신학이 각자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교육학은 교육학의 고유한 이론과 방법의 집을 갖고 있다. 만약에 신학이 신학의 영역을 넘어서서 교육학에게 신학의 이론과 방법에 따를 것을 고집한다면, 교육학은 그러한 신학과는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육학은 절대화하는 신학을 소화할 수 없고, 수용할 수도 없다. 이는 대립적 입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두 왕국은 서로 나란히 존재하나,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상호 간에 서로 상대방을 문제시하는 나쁜 방법으로 섞여 있지도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두 왕국은 각각 고유한 그리고 구별되는 방법으로 나란히 존재한다. 이상과 같이 교육학과 신학도 독자적이고 구별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상대화하는 크기의 관계로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교육학과 신학의 관계를 정치와 신학의 관계나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여러 모델들처럼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것이 상호 공존하는 두 왕국이론의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신학은 세계를 위한 신학 자체의 고유한 이론을 개발한다. 예를 들면 세속적 교육을 위한 신학의 이론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교육학은 그러나 교육학 자체의 고유한 이론을 만들어서 구체적 세계 안에서 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한다. 서구의 2000년에 걸친 역사에서 우리는 국가가 교회법의 시녀가 아닌 것처럼 교회도 헌법의 시녀가 아닌 관계로 교회와 국가가 발전하여 왔음을 알고 있다. 시녀라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표현이요 이해임을 깨닫는 데에 서구는 천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 이성의 자유를 부정하며 숱한 생명을 살해하고 다양한 과학적 탐구와 예술적 창작을 억압하고 제약하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지나간 시대가 우리에게 전승시켜준 사유의 형식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승되어 내려온 근대적 논리는 일정한 위계질서 아래 묶여 있다. 이러한 논리에 사로잡힌 사고는 논리가 제공해 주는 틀 안에 있기 때문에 언제 나이미 치우쳐 있다. 그러한 논리는 교육학을 신학의 시녀로 만들거나 신학을 교육학의 시녀로 만들거나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Nipkow는 상보적(komplementaer) 논리를 강조하고 있다. 위계적 논리에서 상보적 논리에로의 논리적 전환이 기독교교육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바르게 정립하게 하며 기독교교육을 성숙하게 실현하게 하는 논리로, 오늘날의 기독교교육학에서 전반적으로 요청된다.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우리는 기독교교육학자로서 가름과 치우침을 경계하여야 한다. 전세계의 기독교인은 끊임없이 유대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하면서 유대민족을 미워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신학적으로 보면 분명히 가름이 있고 또 필요하다. 유대인은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으나, 우리 기독교인은 기독론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섬기고 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일에 그들의 메시아는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로 한 분이실 터이니, 모든 가름이 의미가 없어진다. 이는 기독교교육을 함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모두 기독교인으로 교육할 뿐, 다른 어떤 가름을 통한 교육을 함으로써 기독교교육을 좁은 교육으로 만들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우리는 믿으나 유대인은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대인을 정죄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좁은 교육이다. 우리는 유대인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열어놓는 넓은 교육을 시도하여야 한다. 칭의(Rechtfertigung)도 사도 바울이나 루터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비유로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기독교교육을 할 뿐, 구약의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신약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구원과 가르는 교육을 해선 안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칼빈은 좋은 모범이 된다. 칼빈은 구약과 신약을 인간을 구원에로 교육하시는 하나님의 교육활동의 역사로 보고, 구약의 교육을 어린 자녀를 교육하는 부모의 교육에 비유되는 아동교육기로, 신약의 교육을 청소년이 된 자녀를 교육하는 부모의 교육에 비유되는 청년교육기로, 그리고 그 후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한 앞으로 끝날이 올 때까지 계속될 교육을 성령에 의하여 인도되어지는 성인교육기로 보았다.
기독교교육은 오랫동안 세례교육, 문답교육, 교리교육으로 대표되는 '복음적 수업' 이어 왔다. 비록 복음적 수업이 기독교교육의 긴 역사에서 시작과 전개의 기초요 중심을 이루어 왔으나, 기독교교육이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 중심으로, 다원적 사회 안에서의 교육으로, 해석학과 비판이론으로 재구성된 이론으로, 주일학교 교육에서 교회학교 교육으로, 교회교육에서 교육목회로, 그리고 기독교적 교육 일반으로 확대, 심화되어 가면서 기독교교육학은 복음적 수업을 포괄하고 있는 학문으로, 'didache'로 강조되는 좁은 교수학에서 'paideia'로 강조되는 넓은 교육학으로 발전하여 왔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화(Globalisierung)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터넷의 그물로 짜여져 있는 하나의 세계를 살고 있다. 세계화는 기독교교육의 지평을 확대하고 내용을 심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도전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모든 피조물이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오리라는 말씀이 가시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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