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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학

기독교교육학개론 - 기독교교육학의 역사(3)

by 곽까운낭만 2023. 6. 27.

5. 종교개혁시대 기독교교육

종교개혁 기는 지방국가 발생, 자본주의 경제의 부상,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 농부들의 자신감 발달, 전 영역의 문화번영 등 그야말로 변혁기였다. 한편 학문은 경시되고, 미신이 팽배하며, 신분은 귀족, 승려, 농민 등으로 차별화되었다. 귀족과 승려는 소수였고, 자유농, 반자유농, 농노 등으로 이루어진 농민은 다수였다. 나머지는 수공업자, 상인, 법률가, 사무원 등 중산계층이었다. 농노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만 하고, 짚 위에서 잠자며, 의료혜택마저도 없었다. '신성 로마제국' 이라는 국립교회는 영성계발을 소홀히 한 채 권력과 유착했다. 그리고 각종 세금을 수탈하고 포탈했다. 또한 자선행위로 구원 얻는다며 면죄부까지 판매했다. 수많은 토지를 교회소유지로 돌렸다. 사제 임직시 1년분 사례비를 교황에게 상납하는 사례도 있었다. 대학과 사원학교 등교육기관들은 '교권에 의해', '교권을 위한시녀로 전락했다. 이때 르네상스 인본주의에 영향을 받은 에라스뮈스(466?-1536), 루터(1483-1546), 칼빈(1509-1564), 츠빙글리 (14841531), 멜랑히톤(1497-1560) 등이 개혁자로 나섰다.
대학교수이자 교구사제였던 루터 (1483-1546)는 '성서로만', '믿음으로만', '은총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며, 만인사제론을 주창했다. 인간은 영·혼·육 세 가지로 구성된다며 영을 위해서는 경건이, 혼을위해서는 덕이, 육체를 위해서는 학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522년 독일어 신약성서를 출판하여 미사 때 사용하자, 일반 평신도들 도예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칼빈(1509-1564)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 주권을 강조하고, 국가와 교회는 일치한다며,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고자 교회, 가정, 국가를 통합하되 정치권력을 교회 아래 두는 신정정치 신국사상을 전개했다. 또한 목사의 교사역을 강조했다. 1541년 교리문답을 발간했다. 그 영향을 받아 1563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가 나왔다. 개혁자들은 교육목적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칼빈), 하나님말씀따라 이웃에게 봉사하는 선하고 책임 있는 시민생활(루터)에 두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준 것은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교육하기 위함이고, 부모대역인 교사들은 학습자를 신앙으로 이끌고, 윤리적 삶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주창했다. 그는 교회와 국가는 그 목표가 사회복지 구현과 백성의 개화라는 점에서 같다고 인식했다. 그는 기독교교육 목표를 하나님에 관한 점진 교육,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과 국가에 대한 봉사자 양성, 인격함양, 하나님을 향한 봉사의 한 측면인 문화증진, 신앙발달 촉진 등에 두었다.
교육내용에서 루터는 성서, 교리문답, 독어판 이솝이야기, 음악, 체육, 지리, 역사, 수학 등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세계사는 하나님의 섭리 이야기이며, 삶의 안내자이므로 세상이해에 필수라고 강조했다.음악은 신학 다음가는 주님의 선물이라며 그것이 영성생활을 확장시키고 밝혀준다고 보았다. 또한 복음을 전파하도록 언어를 주셨다며 어학공부를 강조했다. 칼빈의 경우 시작기도, 한낮 시편노래, 오후 4시 주기도 암송, 신앙고백, 십계명 암송, 수요일 아침의 설교 청취, 토요일의 교리문답, 주일예배 참석과 설교 묵상 등으로 구성했다. 교육장소를 루터는 당시 귀족과 수도승만이 입학하던 것을 더 넓히기 위해 1527년 국민학교(Volk Schule)를 개설하고, 칼빈은 '제네바아카데미' 등을 신설했다. 교육과정은 세 학교로 나뉘어 첫째 분반은 알파벳, 주기도문, 사도신경, 주기도문 입문서 등으로 만들고, 둘째 분반은 문법, 이솝우화,모셀라누스(Peter Mosselanus)의 교육학, 에라스뮈스의 대화집, 교리, 성서 일부 등으로 구성하고, 셋째 분반은 음악, 작문, 논리학, 변증법, 수사학 등을 가능한 라틴어로 교육했다. 목사 등 전문인이 교사역할을 했다. 교육방법으로 성서보급, 성서공부, 성서 중심 일반학습, 문답식, 암송 등만을 채택했다. 토론과 논쟁과 연극을 통한 학습을 추구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지도는 지양했다. 조롱과 구타를 동반한 교육은 아이들의 기를 죽인다며,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도 사랑하고, 반복하여 지도하면 마침내 습득한다고 주장했다. 어학공부는 구두교수법을 권장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종교개혁자들은 대중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시와 평의회가 공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설득하며, 성서를 대중이 읽도록 번역하고, 교회의 타락상과 신앙의 모순을 시민에게 각성시킴으로써 기독교교육 발전에 공헌했다.
한계점은 시정부와 교회와 사회가 함께하는 민주교육 시행보다 정· 부가 공교육을 전담함으로써 국가통제의 획일교육으로 나아가고, 농노는 배제된 중산층 위주의 개혁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농민 폭력시위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질서로만 받아들여 군주들의 사살을 허용한 점에서 농민에게 동정과 자선만을 베풀었을 뿐 근본적 제도변혁에는 한계를 노출했다. 농민 스스로 생각하고 결단해서 내일을 개척하는 자주성 함양은 미흡했다. 일방통행식 주입식 설교에 치중했고, 한 신학자의 신앙이해를 교리문답으로 절대화한 점 등도 한계로 지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