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한국 기독교교육사
1884년에 개신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한국의 기독교교육은 도전과 응전의 ‘전(前) 학문 여명기', 겨레와 교회의 자유를 위한 '대결기', 세속성 대 복음성의 타협기', 자기 확립의 '정체성 추구 발전기' 등의 형태로 흘러왔다.
1) 도전과 응전의 '전(前)학문 여명기' (1884-1919)
1882년 김청송은 인쇄식자공으로 성경인쇄에 참여하여 중국 간도한인촌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같은 해 3월 로스에게 세례 받고 28개 한인마을을 순회하며 7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885년에 학교를 설립했는데 그것이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884년 입국한 알렌은 포교 목적으로 병원과 학교를 활용했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오면서 기독교교육은 시작되었다. 기독교학교를 통해 성서와 함께 신앙교육을 시도했다. 교육받은 학생들은 반외세 반봉건운동을 주도했다. 1886년 감리교 스크랜턴 여선교사가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언더우드는 1885년 정동에 경신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고아학교'를 설립했으며, 그 후 1915년 경신학교 대학부인 연희 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가 지금의 연세대학교이다. 1887년 평양에 유년주일학교 5곳을 설립했다. 1888년 스크랜톤과 아펜젤러가 장년부 주일학교 시작했다. 1890년 언더우드는 서울에서 7명과 함께 사경회를 개최했다. 1894년 평양에 숭실학당, 숭의여학교, 광성학교 등을 설립했다. 1905년 '재한 복음주의 선교사 통합공의회 산하에 '한국주일학교 실행회'를 두고 만국통일공과를 발행했다. 1913년 조선선교연합교육부는 「예수교 내학교과정급 교과용 도서일람표」를 발간했다. 1918년 남감리회 한국연회 총회교육부'가 설치되었다. 1922년 조선주일학교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1925년 조선주일학교 연합회는 모범 생활니야기를 펴냈다. 1926년 '조선예수교 종교교육연구회'가 창설되어 주일학교 조직」을 냈고, 10년 후 하기 성경학교 교과서를 펴냈다. 1930년 감리교회 총리원 교육국'이 설치되어 주일학교 예배지도방법」을 출판했다.
1907년 제5회 주일학교 로마대회에 윤치호가 사적으로 참가하여 한국상황을 설명했다. 1908년 이화학당은 5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기독교학교는 823개, 학생수는 20만을 초과했다. 제6회 주일학교 워싱턴대회에서 윤치호가 실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11년 세계 주일학교협회로부터 2,000달러를 받아 세계 통일공과를 펴냈고, 주일학교 위원회를 조직했다. 1913년 제7회 주일학교 취리히대회에 신흥우가 참석했다. 세계 주일학교협회장 하인츠가 내한하여, 주교대회에 14,200명이 참가했다. 그 후 매주 노래와 성경이야기 중심으로 운영했다. 1915년 유년주일학교를 발족하여 전도활동을 펼쳤다. 교육목적이 포교였으므로 교세확장에 기여했다. 1919년 홍병선이 계간 주일학계를 펴내 4년간 지속했다. 이어서 계단공과도 출간했다. 3.1 운동 때까지 장로교 입교인은 10여만 명에 달하는 등 서구문화의 매개체로서 계몽에 이바지했으나 타계(他界) 중심으로 사회문제는 외면했다. 교회교육은 미국 선교정책을 따라 교세확장 및 위로에 중점을 두었고, 어린이 교육보다 성인교육에 관심했다. 초신자를 향한 기독교 진리 전수에 치중했다. 사경회와 예배 한 시간 전 성경공부 중심의 장년 주일학교를 시행했다.
초기 교육은 서구문명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평민과 부녀자도 읽게 했다. 출애굽 이야기는 일제로부터의 해방, 바벨론 포로생활은 한국 정황을, 로마제국주의는 일본제국주의를 시사했다. 이와 같이 성서내용이 한국의 상황과 흡사하여 위로가 되었다는 점은 주일학교의 공헌이었다. 하지만 교육을 전도와 교회확장으로만 삼는 데 주력하고, 타계 및 내세 중심의 교육으로 인해 비역사적 신앙을 초래했다는 한계도 낳았다.
2) 겨레와 교회의 자유를 위한 주일학교와 문화운동의 '대결기'(1920-1945)
3·1 운동 후 일본제국주의가 유화정책을 사용하자 민족지도자들은 조선, 동아, 시사신문 등 언론문화운동, 국어 및 국사학 연구와 연극, 영화 등의 예술운동, 사설강습소와 야학 등을 통한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애국부인회, 색동회, 물산장려회, 협동조합, 소년척후단, 박헌영의 조선공산당(1925) 등 국민정신을 깨우치고 내적 힘을 키우는 문화운동에 골몰했다. 일제는 신사참배 및 일어사용과 창씨개명 등을 강요했다. 한민족얼을 고취하는 신문은 폐간했고, 내선일체 정책을 추진했다. 3·1 운동 후 교회는 타계신앙이었으나 급성장했다. 1922년 11월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발족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기독교조선감리회, 북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선교회, 캐나다장로회선교회, 호주장로회선교회, 미감리교선교회, 남감리교선교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조선야소교서회 등 10개 단체가 가입했다. 마포삼열 부인이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하여 8년 후엔 36,200명으로 증가했다. 기독교학교는 대학 4개교, 중학 46개소, 소학교 1,021개교에 달했다.
선교사들이 주일학교에 필요한 초보수준의 책을 펴내는 가운데 강운림이 1827년「기독교 종교와 교육」을 펴냈다. 1924년 조선기독교연합회가 결성되고, 주일 오후 훈련받은 교사들이 선교사 차로 어린이들을 전도하는 확장주일학교를 시행했다. 1925년 아희생활잡지를 발간했으나 1938년 강제 폐간되었다. 1926년 허대선이 계간지 주일학교 잡지를 창간하여 1930년에 종교교육」으로 발전했다. 1927년 부별 계단공과가 보급되었다. 1930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해 개최한 하기학교 숫자는 36,239명으로 증가했다. 주로 미국의 통일공과를 번역해 사용했다. 1929년 킨슬러(Francis Kinsler)는 성경구락부를 설치하여 성경, 한글, 지리, 산수, 자연 등의 소학교 과정을 운영했다. 1931년 일제가 사변을 일으켜 만주제국을 건설하고, 1932년 하기 아동성경학교수는 1,071개교에 701,786명에 달했으며, 김준옥이 주일학교 조직과 관리를 펴냈다. 1933년 교수요목을 미국에서 들여와 한국에 맞게 조금 수정하여 편찬했다. 1934년 장로교와 감리교를 합해 128,926명으로 하기 학교가 증가했다. 장년공과 판매수는 37,604권, 어린이공과 판매수는 15,943권에 달했다. 1939년 배덕영이 주일학교 교수법」을 펴냈다. 1940년 조선기독교서회가 만국통일주일공과를 출판했으며, 대동아전쟁으로 주일학교운동도 쇠퇴했다. 1943년 장년부 교재는 신사참배를 정당화하는 내용을 수록하기도 했다. 양적성장을 꾀하고, 억압당하는 어린이, 청소년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며, 민족개조운동,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방정환의 색동회, 조철호의 소년 척후단, 연희전문학교에서 시작된 물산장려운동, 전진한 중심의 협동조합운동, 토산품 애용운동, 자력갱생운동, 농촌 계몽운동 등은 한국 기독교교육의 공헌점으로 꼽힌다.
한편 이적과 종말신앙, 신비주의와 내세 등을 강조하면서 생활신앙을 형성하는 데는 미흡했다. 주일학교도 미국교재를 반복하는 데 그쳐 한국의 상황을 교재에 담지 못했다. 교파중심 때문에 민족 자주정신을 살리지 못했다. 김재준, 송창근 등이 세계교회와 대화를 시도하고, 김춘배 등이 여성권리를 주장했으나 박형룡 등이 이의를 제기하여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킨 점도 아쉬운 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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